추락의 해부
영화 기본 정보
수상: 제7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 쥐스틴 트리에
각본: 쥐스틴 트리에 & 아르튀르 아라리
장르: 스릴러, 드라마
런타임: 152분 _ 2시간 30분 정도
개봉일: 한국 2024년 1월 31일
주요 등장인물: 엄마와 아들 그리고 반려견
산드라 역- 산드라 휠러
다니엘 역-밀로 마차도 그라너
스눕 역-메시
두 개의 결론으로 본 리뷰
1. 산드라가 범인이다
우선 나는 산드라가 범인인 쪽에 손을 들겠다. 영화를 보고 직관적으로 느낀 아주 주관적 관점입니다.
2시간 30분의 긴 러닝 타임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나는 산드라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재판에서 이기고 집으로 돌아온 산드라에게 아들 다니엘이 던진 첫 대사는 " 엄마가 돌아오는 게 무서웠어요"였다. '응? 저게 무슨 소리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두 인물의 행동과 표정을 상당히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들 다니엘의 행동에 자꾸 왜?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1년이 넘는 긴 법정 다툼 후의 승리인데 왜 아들은 엄마와 기쁨의 포옹이 아닌 "엄마가 오는 게 두려웠어요"라는 말을 했는가? 또 마치 자는 척이라도 해서 오늘 밤만은 엄마와 만나는 걸 피하고도 싶다는 듯 이불 안에 쏙 들어가 나와보지도 않는 것일까?
다니엘은 아스피린을 찾을 때 약이 아스피린이 맞는지 한쪽 눈 가까이 가져다 대고 들여다보았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칠 때 굳이 필요 없는 악보를 크게 확대해서 앞에 놔두었었다. 영구적 시력장애를 가졌지만 사실은 한쪽 눈은 아주 약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어쩌면 모든 걸 못 보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추측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와 다니엘은 서로 가까이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눈다. 이때 산드라가 아들의 눈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러자 다니엘은 찰나에 엄마의 표정변화를 눈치채고 갑자기 피곤한 것처럼 눈을 비빈다. 이 장면이 정말 소름 돋았는데 이 부분을 나만 느낀 건가 다른 리뷰들을 찾아봐도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설마 하던 산드라는 이내 안도하고 아들을 안아주면서 "엄마가 괴물은 아니야" (대사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뉘앙스였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편에 서준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웠겠지. 이 날 밤 아들 대신 강아지 스눕이 산드라의 침대로 올라와 잠이 든다.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죽은 아빠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아들과 함께 하지 않는 승리의 밤은 충분히 의심되는 장면이었다.
다니엘이 엄마 편에서 그녀가 무죄를 받도록 결정적 힘을 주었으나 어딘가 둘 사이는 단절되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산드라가 혐의를 정당하게 벗었다면 앤딩이 왜 이모양이야?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배우자의 상실을 겪은 여자의 가정사가 온 국민이 알도록 해부되듯 파해쳐졌으며 아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위기에서 탈출했다는 고난 극복 영화치고는 아주 오묘한 앤딩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장르가 '스릴러' 다. 드라마 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스릴러 영화이니 스릴러다운 비밀이 당연히 숨어있지 않을까 했다. 이런 의심이 영화의 앤딩에서야 시작되었기에 역으로 산드라라는 인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산드라의 첫인상은 어딘가 마성이 있는 예술가의 관상이었다. 젊은 인터뷰어 조에와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추파를 던지며 말하는 게 습관이 된 사람 같았다. 상대가 동성이건 이성이건 간에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데 익숙한 인물 같았다. 그녀는 자신감 넘쳐 보이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보통 때 그녀의 말투는 굉장히 부드러워서 아주 선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의 부드럽고 이성적인 모습 이면에 급격하게 돌변하는 모습도 있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남편이 녹음해 둔 파일에서 둘이 싸우다 화를 참지 못하고 와인잔을 벽에 던져 깨뜨려 싸움을 더욱 과격한 상황으로 전환시키는 것은 오히려 산드라였다. 이후에 때리고 맞는 소리도 들리는데 산드라는 남편이 자해하는 소리라고 법정에서 말하지만 실은 산드라가 남편을 때리는 소리 일지도 모른다. 그녀 팔뚝의 멍 역시 산드라가 남편을 때리다가 팔을 잡혀서 생긴 멍이 아닐까? 그건 누가 봐도 꽉 잡혀서 생긴 멍이었다. 그녀는 변호사가 뭐든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는데도 그 멍에 대해서 거짓말했었다. 남편이 싸움을 녹음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진취적인 산드라에게 남편이 서서히 무너져 가는 걸 보는 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들이 시력을 잃게 된 사고에 대한 자책감이었는데 자책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남편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결국 외도를 저지른다. 물론 남편도 잘못은 있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무기력을 아내로서 도와주면 어떘을까?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 했는데 아이디어를 가져다 자신의 성취에 취하지 않고 다시 글을 쓰도록 기다려 주었다면 이 추락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모가 되어 다니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지는 않았을 텐데. 다니엘은 진술을 번복하고 스눕에게 약을 먹이는 기행까지 저지르면서 엄마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을 거다. 자살을 암시하는 아빠의 말 역시 사무엘이 어느 정도 만들어낸 대사 같았다. 보이지 않는 사무엘이 상상해서 만든 대사라 아빠의 입모양과 그 대사의 싱크로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다니엘은 엄마가 범인이 아니란 것에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일부러 엄마와 떨어져 시간을 가진 그 며칠 동안 엄마를 구해주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곁에 남은 건 이제 엄마뿐이니까. 검사가 다니엘에게 아빠 사무엘이 스스로 약을 먹은 게 아니라 엄마가 약을 먹였을 거라고 생각은 안 해봤니?라고 질문할 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가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영화 초반에 스눕과 산책을 나갔을 때부터 다니엘의 심리 상태가 일반적인 상태는 아니란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어딘가 외롭고 화가 나 있는 모습도 있었고 연습하는 피아노 곡 역시 그 멜로디와 리듬의 빠르기가 다니엘의 상당히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여준다. 영화 내내 자주 깔리는 이 피아노 곡은 사람의 신경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2.사무엘은 자살했다.
제목 추락의 해부에서의 추락은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추락,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사망, 그로 인한 결과로써 가족 구성원의 추락 여러 의미가 담긴 단어다. 사무엘은 뭐든 다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자신의 범위를 과대평가하여 실수를 많이 했고 예상치 못한 불행들이 일상을 덮치고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이 모든 일이 사실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정죄하지만 그럴수록 방어기제는 가족들에게 발현되어 상황을 더욱 안 좋게 몰아간다.
다니엘의 불안한 심리상태로 보아서는 산드라와 사무엘은 자주 싸웠을 것이며 그 모습을 다니엘에게 자주 들켰을 것이다. 다니엘이 둘이 싸우지 않는 편이라고 말하는 건 절대 믿기 힘들다. 다니엘은 영리한 아이라 가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말로 빌미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이 스눕에게 실험한 일과 다락으로 위험하게 올라가 본 일 등을 봐도 아주 치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임을 알 수 있다.
사건 당일도 아빠와 엄마의 싸움을 예측하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사무엘은 아내와 인터뷰를 하러 온 매력적인 여자에게 끔찍한 질투를 느낀다. 아내와 인터뷰어의 묘한 분위기도 싫지만 돈 벌어보겠다고 다락이나 고치는 자신과 다르게 찬사를 받으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내가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p.i.m.p라는 여성비하 가사의 음악을 있는 대로 크게 틀고(점점 더 볼륨을 올림) 자신의 틀어진 마음을 표출한다. 결국 어렵사리 시간을 맞춰 진행한 인터뷰를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산드라는 조에가 떠나고 아들이 스눕과 산책을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남편이랑 한바탕 싸우러 다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사무엘이 자살을 한 게 맞다면 이 싸움이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사건 전날에도 아내의 외도와 일에 대한 열등감으로 싸웠는데 이 날의 싸움은 전날의 두 배 이상의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우울증이 있다면 충분히 홧김에 죽을 수 있다. 실제로 우울증 상태에서 싸우다가 홧김에 베란다로 뛰어가 추락해 죽은 사람을 알고 있기에 사무엘이 자살할 심리적 동기는 충분하다고 보인다.
산드라와 싸울 때 산드라의 말에 더 납득이 가는 건 사실이었다.(불륜 저지른 부분 빼고) 그녀의 말처럼 사무엘은 스스로가 놓은 덫에 스스로가 걸려 버린 것이다. 빠져나오고 싶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잘해보고 싶어서 높이높이 올라온 곳에서 그는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해 버리고 만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대부분 남자)이 사무엘에게 공감이 된다고 말했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남자들은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먼 옛날 죽음을 무릅쓰고 사냥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라는 그 본능이 dna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회피의 심리 역시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두 역할의 경계에서 언제나 줄다리기를 하는 게 남자 같다. 사무엘은 그래도 책임 쪽으로 더 기운 사람 일 것이다. 결국 과도하게 기울어 버렸지만 말이다.
나는 산드라를 의심했지만 다니엘에겐 아빠의 죽음이 자살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다니엘이 '어떻게 보다 왜'에 집중한 것은 아빠의 죽음을 최대한 고통 없이 받아들이고 싶었기에 내린 결론 같았다. 엄마에 대한 혐의의 의혹을 거두게도 했지만 아빠의 마음을 이제라도 알아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았다.
+여담
* 스눕 역할의 메시는 연기 상을 받았다고 한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공을 가지고 노는 장면으로 '추락'이라는 이미지의 오프닝을 열어준 강아지 메시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존재감이 워낙 대단해서 죽은 사무엘의 영혼이 스눕에게 빙의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산드라가 진짜 범인이라면 완벽한 계획 살인이다.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추리형 열린 결말 영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 산드라는 거짓말을 하기 전에 기침 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 이 영화를 보고 짧게 리뷰를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 같다. 디테일하게 따지고 들자면 말할게 수만가지다.